첫 직장은 전라도 광주였다.
입사 확정 메일을 받고는 뛸듯이 기뻐서 일하는 곳이 어딘지 확인도 안했다. (자소서 그대로 : 어디서 뭘하던 열심히 하겠습니다! 마인드) 그 순간에도 내가 이미 넣은 이력서는 10개 이상이 전형을 돌아가는 중이었고, 내일 써야할 이력서, 모해까지 제출해야할 이력서도 몇개가 진행중이었다. 이제는 다 때려치고 싶었나보다. 고만고만한 기업들이라 생각이 들었고, 그냥 여기를 가야 겠다고 다짐하기까지 1시간도 안걸렸다. 더 자소서를 쓸 기력도 없었고, 남들보다 길게 했던 취업 준비 기간을 끝내고 싶었다. 어느새 남들은 다 일하고 있는데 나혼자 취업스터디를 하고 있는 것이 싫었다.
광주였다.
경기도 광주 아니고 전라도 광주. 난 봉천동 고시원에 살고 있었는데, 첫 직장이 전라도 광주였다. 광주는 둘째치고, 나는 살면서 전라도를 가본적이 한번도 없었다. -_-; 2010년 이었는데 그때 네이버 맵이라던지 이런거 없었다. 열심히 알바한 돈으로 드럽게 비쌌던 아이폰3gs (50만원, 그때 최고가) 들고 다닐때라 인터넷이나 와이파이는 커녕 제대로 돌아가는 앱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컴퓨터에서 네이버 맵을 확인하고 출력(-_-;;) 해서 지도를 들고 갔다.
면접때
임원 면접은 광주 공장에서 한다는 해서 처음 왔었다. 면접 시간이 오후 1시였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표를 구하지 못해, 면접 끝나고 하루 자고 다음날 기차를 타고 오려고 했다. 기차를 타고 광주역에 내려서 보니 시간이 많이 남아서 커피점에서 커피 마시며 자소서좀 보면서 시간을 때우려 했는데, 그것은 사치였다. 2010년에는 광주역근처에, 앉아서 자소서를 볼만한 가게가 하나도 없었다. -_-;; 나름 광역시라고 하면 그래도 대도시니까... 라고 생각했었는데, 지방의 노령화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었던 순간이었다. 길거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있고, 시장이 있고, 커피점같은 건 없고, 자꾸 할머니들이 어디서 놀다가라고 말하고 -_-;;
지금 네이버 맵으로 다시 검색하니까, 그래도 10년이 지난지라 많이 발전 한 것 같다. (무슨 건물이 저렇게 짠 하고 생겨나지-.-?)
여튼 출력한 지도를 들고 공장까지 갔었는데, 더 놀라운 것은 공장쪽으로 갈 수록 건물이 하나 둘씩 사라지고 허허 벌판만 남았다는 것이다. 아니.. 길이 이게 맞니? ㅠㅠ 광주역에서 택시로 30분 이상 걸리는 거리였고, 허허벌판에 공장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래... 이게 내가 선택한 길이다.
신입사원
신입사원 교육을 2주간 받았다. 쉬는 시간마다 할 수 있는 것이 커피와 담배를 들고 공장 층층 사이에 발코니 같은곳에 나와서 쉬는 것 뿐이었는데, 옆 공장의 지게차 움직이는 것 밖에 보이는게 없었다. 분명 신입사원들 끼리 모여있었는데, 처음부터 한다는 말이 "옆직장은 얼마 더 준데", "그래도 어디어디 가면 돈 더 주는데, 광주에서는 이게 최선이야" 이런 이야기만 하더라. 무슨 희망퇴직 통보 받은 부장님들이 모여서 이야기 하는 줄 알았다. 어떤 형은 35살인데 네번째 직장이라고 했다. 꿈도 희망도 없었다.
숙소
광주 무슨 센터에서 동기 전원이 같이 숙박을 했었는데, 편의점이 근처에 없어서(-_-) 차가 있던 동기 형이 "수퍼마켓 갈사람~" 하면 "저요저요" 하고 손들어서 차타고 30분 떨어진 홈플러스를 가서 생필품을 사왔었다. 주변은 6시만 되도 가로등도 없이 깜깜 해져서 숙소에서 과제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지방 공장 답게 동기가 모두 남자였다. 크흑 ㅠㅠ
동기
동기들 중에 강원도에서 소를 키우다가 온 친구가 있었다. 고등학교까지는 매일 산을 타며 등교 했다고 했고, 파워포인트와 엑셀이 뭔지 몰랐다. 그리고 집에 컴퓨터가 없어서 취업하고 돈모아서 산다고 했다. (아니.. 어떻게 졸업한거지? 자소서는 어떻게 낸거지?) 그래서 그런지 체력이 엄청났다. 그 친구는 해외영업을 지원했었다. 영어를 할 줄 모른다고 했다.
끝내며
결국 나는 다니다가 여러가지 이유로 추노했고, 그래도 첫 직장이라 여러가지 그리운 기분이 든다. 그때 자주다니던 도로를 봤는데, 어머나 세상에
이렇게 바뀌었다. 무슨 신도시 예정지 같은 곳이었나 보다. 내가 그 회사에 뼈를 묻고 인내하며 계속 다녔다면 신도시로 업그레이드 할 만큼의 혜택을 받았을까? 내가 추노하고 다른데 갔던 것은 좋은 선택이었을까? 아직도 나는 답을 모르겠다. 그 이후로 10년동안 또 다시 전라도를 갈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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